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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en of Soul,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 향년76세로 별세

Queen of Soul,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 향년76세로 별세



“소울의 여왕으로 군림했던 아레사 프랭클린의 타계 소식을 전하게 되어 몹시 안타깝고 슬픈 마음이다. 그녀는 8월 16일 오전 9시 50분에 디트로이트의 자택에서 76살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이 그녀의 임종을 지켰다. 정확한 사인은 신경내분비췌장암(pancreatic cancer of the neuroendocrine)으로 판명이 났다고 아레사 프랭클린의 담당의사인 디트로이트의 카르마노스 암 센터의 필립 필립스가 확인했다. 우리 일생에 가장 힘겨운 순간 중 하나이며, 우리의 마음의 고통을 그 어떤 단어로도 표현하기 힘들 정도이다. 우리의 여장부이자 우리 가족의 단단한 주춧돌을 잃었다. 그녀는 자식, 손자, 조카들, 친척들에게 무한의 사랑을 베풀던 존재였다. 또한 전세계의 팬들과 가까운 친구들로부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사랑과 응원, 격려를 받았다. 다시 한 번 팬들과 친구/동료들의 위로와 기도에 감사를 드린다. 아레사 프랭클린을 향한 당신들의 깊은 사랑은 그녀의 업적이 앞으로도 지속될 것임을 확신하게 만든다. 비통함에 젖어있는 유족들의 사생활을 존중해주길 요청드리는 바이다” (아레사 프랭클린 대변인 성명 번역)


'소울의 여왕', '레이디 소울(Lady Soul)'이란 호칭으로 미국 흑인음악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그리고 수많은 후배 뮤지션들의 존경을 받아왔던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의 타계 소식은 그녀의 목소리와 노래를 사랑하는 세계의 음악 팬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재즈 시대의 원조 디바들의 명성이 서서히 대중들의 기억에서 멀어져 갈 즈음인 1950년대 중반에 아레사 프랭클린은 14세라는 당시 여성 뮤지션으로서는 꽤 어린 나이에 가스펠 가수로 음악 씬에 등장했고, 그 후 1960년대부터는 소울 보컬리스트로 본격적으로 활약하며 주옥같은 명곡들을 히트시키면서 지금 우리가 그녀에게 부르는 '소울의 여왕'이란 칭호를 대중에게 부여받았다. 그리고 그 시절부터 현재까지 수십 장의 앨범들을 발표했고, 그 가운데 (빌보드 차트 기준) 총 112곡의 차트 히트 싱글을 만들었다. 특히 그 속에는 77곡의 Hot 100 히트곡들과 17곡의 Top 10 싱글, 그리고 얼마 전 달성한 총 100곡의 R&B 차트 진입과 21번의 R&B 차트 1위 등극이라는 대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한편, 아레사는 1987년 인종을 넘어 여성 뮤지션으로서는 처음으로 로큰롤 명예의 전당(Rock N' Roll Hall of Fame)에 헌액되는 영예를 얻었으며, 바다 건너 영국의 대중음악 명예의 전당(UK Music Hall of Fame)에도 2005년 그 이름을 올렸다. 롤링스톤(Rolling Stone) 매거진이 발표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100명의 가수들(100 Greatest Singers of All Time)' 리스트에서 수많은 남성 보컬들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하여 음악 팬들을 놀라게 했다. 


그녀가 이렇게 대중음악 팬들에게 절대적 지지와 높은 평가를 50년 넘게 받아왔던 궁극의 이유는 무엇보다 현대 대중음악에서 '디바'로서 갖출 모든 덕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어린 시절 가스펠 가창에서부터 체득한 풍부한 성량과 감정을 그대로 음에 싣는 바이브레이션, 그리고 누구의 노래를 부르건 자신의 메시지로 완벽하게 구현하는 풍부한 표현력을 그녀는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그녀의 최대 히트곡 중 하나인 'Respect'는 오티스 레딩이 먼저 녹음하고 부른 곡이었지만, 오티스는 그녀의 커버 버전을 싱글 발표 전에 스튜디오에서 미리 듣고 이제 그 곡은 앞으로 그녀의 노래가 될 것이라 인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의 등장 이후 그녀가 보여준 보컬리스트로서의 장점들은 모두 후배 디바들이 배우고 넘으려 노력해야 할 하나의 모범으로 자리잡았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음악 채널 Vh1의 특별 이벤트 'Divas Live' 시리즈 공연의 1998년 첫 무대에서 같이 출연한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 셀린 디옹(Celine Dion), 글로리아 에스테판(Gloria Estefan), 샤니아 트웨인(Shania Twain) 등 기라성같은 후배들의 존경을 받으며 당당히 헤드라이너 무대를 장식했던 장면은 그녀가 미국인들, 아니, 세계인들에게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가를 보여준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60년 가까이 소울의 여왕의 품위를 지켜온 아레사 프랭클린의 음악 여정


1942년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태어난 아레사 프랭클린은 그 지역 목사인 아버지와 성가대 피아노 연주자 겸 보컬리스트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파경 후 5살 때 아버지를 따라 디트로이트로 이사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 손에서 자라며 당시 '백만 달러의 설교'라는 명성을 들으며 전국구 목사로 이름을 날리던 아버지의 교회와 집에 찾아오는 낯선 연예인 신자들을 만나야만 했다. 흥미롭게도 그 속에는 자신을 보모처럼 키워준 가스펠 싱어 마할리아 잭슨(Mahalia Jackson)도 있었고, 클라라 워드(Clara Ward), 제임스 클리블랜드(James Cleveland)같은 여타 가스펠 싱어들부터 아직은 대스타가 되기 전의 청년 재키 윌슨(Jackie Wilson)과 샘 쿡(Sam Cooke), 그리고 훗날 위대한 민권운동가가 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들도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집에서 부르는 노래와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귀로 피아노 주법과 가창 방법을 익혔다. 


10대 초반부터 교회 성가대에서 찬양을 부르며 그녀의 가창력을 뽐내기 시작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아레사가 14살 때부터 그녀의 매니저를 자처하며 교회 가스펠 성가팀을 조직해 전국 교회 투어를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가스펠 레이블 J.V.B.와 계약을 맺어 인디 데뷔 앨범이자 가스펠 앨범 [Song of Faith](1956)를 제작했다. 그러나 함께 투어를 돌던 샘 쿡에게 반하게 된 그녀는 18살에 아버지께 가스펠 씬을 떠나 본격 가수가 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아버지는 이에 동의하면서 2곡의 데모 테이프를 만들어 여러 음반사에 보냈고, 이에 관심을 보인 여러 레이블들 - RCA, Tamla 레이블 등등 - 가운데 콜럼비아(Columbia) 레이블과 계약을 채결했다. 1960년 9월 첫 싱글 'Today I Sing the Blues'를 발표하면서 그녀의 본격 R&B 가수로서의 경력이 시작되었고, 1961년에는 첫 메이저 정규 앨범 [Aretha]를 공개해 첫 싱글 'Rock-a-Bye Your Baby with a Dixie Melody'를 싱글 차트 37위에 올렸다. 한편, R&B 차트에서는 'Won't Be Long'과 'Operation Heartbreak' 등이 Top 10 싱글이 되었다. 그러나 첫 앨범에서는 스탠다드부터 재즈, 블루스, R&B까지가 잡다하게 섞인 경향이 있어 그녀만의 개성을 확실히 드러내지는 못했다. 그리고 레이블은 그녀의 가스펠 보컬로서의 장점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1967년작 [Take A Look]까지 총 10장의 앨범이 공개되었지만 아직 그녀를 확실한 스타덤으로 인도한 작품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아레사는 6년간의 계약 기간이 끝나자 바로 레이블을 어틀랜틱(Atlantic)으로 옮겼다. 그녀는 앨라바마(Alabama) 주 머슬 숄(Muscle Shoals)로 여행을 가서 녹음했던 싱글 'I Never Loved a Man (The Way I Love You)'를 67년 2월에 발표해 R&B차트 1위, Hot 100 9위에 올려놓아 드디어 그녀의 실력을 증명해냈고, 4월에는 앞서 서두에서 언급했던 오티스 레딩이 먼저 녹음했던 싱글 'Respect'를 발표, 두 영역 차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다. 이 곡은 당시 1960년대 흑인 민권운동, 그리고 여권운동의 시그니쳐 송으로 대중의 입에서 계속 불려지면서 시대를 상징하고 대변하는 곡으로 미국 역사 속에 기록되었다. 앞선 두 싱글의 큰 상업적 성과를 바탕으로 그녀의 어틀랜틱에서의 첫 작품인 [I Never Loved a Man the Way I Love You](1967)는 2곡의 추가 Top 10 히트곡들 - 'Baby I Love You'와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 - 을 낳으며 골드 레코드를 기록했다.

 


다음해에는 현재까지도 그녀의 대표 명반으로 꼽는 2장의 앨범 - [Lady Soul]과 [Aretha Now] - 이 연이어 발표되었다. 이 두 장의 앨범들 속에는 지금도 그녀를 대표하는 히트곡들 - 'Chain of Fools', 'Ain't No Way', 'Think', 'I Say a Little Prayer'(한국에는 1994년 영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의 OST에서 다이애나 킹(Diana King)의 커버 버전으로 뒤늦게 많이 알려졌다) - 이 많이 수록되었고, 앨범 전체적으로도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또한 그 해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R&B 여성보컬 부문 등 2개의 상을 차지하면서 확고한 스타급 뮤지션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 후 그녀는 1970년대 벽두까지 [This Girl's in Love with You](1970), [Spirit in the Dark](1970) - 를 연이어 발표해 히트시켰다. 그리고 R&B뮤지션으로서는 최초로 록커들이 주로 섰던 공연장인 필모어 웨스트(Fillmore West)에서 공연을 가졌다. (이 실황이 그녀의 라이브 명반 [Aretha Live at Fillmore West](1971)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퀸시 존스(Quincy Jones)와 작업했던 앨범 [Hey Now Hey (The Other Side of the Sky)](1973)부터는 예전만큼의 상업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어틀랜틱 데뷔때부터 그녀의 음악을 프로듀싱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던 프로듀서 제리 웩슬러(Jerry Wexler)가 레이블을 떠나 워너브라더스로 옮겨버리자 그녀는 예전만큼의 수작을 내놓지 못했다. 결국 여러 앨범들이 차트에서 저조한 성적을 거두자, 그녀는 결국 1979년을 끝으로 어틀랜틱을 떠나 명 프로듀서 클라이브 데이비스(Clive Davis)가 차린 아리스타(Arista) 레코드로 이적했다. 레이블 이적 후 첫 퍼포먼스를 영국 로열 앨버트 홀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앞에서 공연을 하는 것으로 시작한 그녀는 'United Together'(1980), 오티스 레딩의 곡을 커버했던 'I Can't Turn You Loose'(1980) 등이 수록된 앨범 [Aretha](1980), 조지 벤슨(George Benson)과 함께한 타이틀 트랙이 히트했던 [Love All the Hurt Away](1981) 등으로 일단 어느 정도의 재기에 성공했다. 또한 루서 밴드로스(Luther Vandross)가 프로듀싱을 담당했던 1982년작 [Jump to It] 앨범은 빌보드 R&B 앨범 차트 7주간 1위를 기록하면서 그녀의 R&B씬에서의 지지도가 다시 굳건해졌음을 확인시켜주었다. [Get It Right](1983)도 그 흐름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녀에게 제 2의 중흥기가 찾아온 것은 1980년대 미국 주류 알앤비의 새로운 경향인 신스 팝적인 펑키 사운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실험을 단행한 이후부터였다. MTV 시대에 맞게 제작한 뮤직비디오들을 홍보에 적극 활용하면서 등장한 그녀의 앨범 [Who's Zoomin' Who](1985)로 오랜만에 플래티넘 레코드를 만들어냈다. 그녀의 80년대를 대표하는 싱글인 'Freeway of Love', 타이틀 트랙, 그리고 유리스믹스(Eurtythmics)와 함께 작업한 또 하나의 페미니즘 송인 'Sisters Are Doing It for Themselves'를 히트시켰다. 1986년에는 세 번째로 [Aretha] 타이틀을 가진 앨범을 발매하면서 조지 마이클(George Michael)과의 듀엣 'I Knew You Were Waiting For Me'를 첫 싱글로 커트해 미국-영국-호주 3개국에서 1위 싱글에 올려놓았다. 롤링스톤스의 히트곡을 커버했던 'Jumpin' Jack Flash'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런 '모던 팝/R&B를 노래하는 아레사 프랭클린'의 모습은 1989년작이자 엘튼 존(Elton John)과의 동명의 듀엣곡이 히트했던 [Through The Storm]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마이클 맥도날드(Michael McDonald), 루서 밴드로스 등 남성 후배가수들과의 듀엣곡들이 담겼던 [What You See Is What You Sweat](1991)은 예상 밖의 상업적 실패를 거두기도 했다. 그래도 1994년 영화 '시스터 액트2'에 수록한 OST 'A Deeper Love'는 빌보드 댄스 클럽 플레이 차트 1위를 기록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다행히 1998년에 다시 그녀는 대중의 찬사를 받은 또 한 장의 앨범을 공개했다. 피 디디(P. Diddy), 저메인 듀프리(Jermaine Dupri), 로린 힐(Lauryn Hill) 등 젊은 뮤지션 송라이터들을 기용해 네오 소울, 힙합 소울의 분위기를 자신의 가스펠 사운드와 접목한 앨범 [A Rose is Still A Rose]가 골드 레코드를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1999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이 음반은 R&B영역 2개 부문의 후보에 오르며 그녀의 꾸준한 저력을 입증해 보였다. (해당 시상식에서 그녀는 'Nessun Dorma'를 노래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1990년대 초반의 보컬 난조를 극복하고 그녀의 원숙한 가창력을 되찾았음을 전세계에 보여주었다.) 2003년작 [So Damn Happy]를 끝으로 아리스타 레이블을 떠난 그녀는 2008년에는 [This Christmas, Aretha]라는 캐롤 앨범을, 그리고 2011년에는 자체 제작으로 발표한 [Aretha: A Woman Falling Out of Love]를 내놓았다. 2014년 RCA 레이블에서 다시 클라이브 데이비스와 손잡고 공개했던 커버 앨범 [Aretha Franklin Sings The Greatest Diva Classics]에서는 선배 에타 제임스(Etta James)부터 후배 아델(Adele)까지 다양한 아티스트들의 곡들을 그녀만의 보컬 색으로 커버했으며, 사망 1년 전에도 어틀랜틱 시절의 보컬 음원 위에 로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새로운 백업 보컬 라인을 입힌 음반 [A Brand New Life]를 공해하는 등 꾸준한 음악 작업을 이어왔다.

 


하지만 2017년부터 건강은 급격하게 악화되어서 여러 공연 무대가 취소되었고, 결국 작년 11월 7일 엘튼 존 AIDS 재단 설립 25주년 갈라 쇼가 그녀의 마지막 공식 퍼포먼스가 되고 말았다. 비록 이제 그녀의 모습은 다시 볼 수 없지만, 그녀가 남긴 주옥같은 음악들과 흑인 음악 역사, 그리고 세계 여성 음악인들의 지위 향상에 미쳤던 영향력은 앞으로도 영원히 기념될 것이라 생각한다. 다시금 고인의 명복을 빈다. 


글/ 김성환



뉴욕 지하철 프랭클린 스트리트 역 플랫폼에 마련된 그녀의 추모 아트. 무엇이 추가되었는지 보이시죠?